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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5. 13. 16:23 - 글쓰는 미생

[도서/리뷰] 어두운 역사, 조선 궁궐 저주 사건

도서관 신간 코너를 한 바퀴 돌다가 유승훈 작가의 『조선 궁궐 저주 사건』을 발견했다. 살짝 무료해지는 일상에 자극이나 주고자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빌려보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골랐지만, 대강 조선 시대에 일어난 사건을 토대로 쓴 소설이겠지 싶었다.

실제로는 끊이지 않는 정사[正史]의 향연이었다. 성종 대부터 정조 대까지 이어지는 아찔한 저주의 칼이 나에게 향하는 듯했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본 조선 시대의 저주와는 사뭇 달랐다. 정적을 향해 악독하게 외치는 폭언이나 헝겊 인형을 바늘로 찌르는 행동은 드라마에서 방송 송출하기 위해 꽤 노력했구나 싶었다. 저주에 쓰이는 생물은 독충부터 인간까지 다양했고 독약이나 자객을 통한 왕실 암살도 왕왕 일어났다.

 

사실 저주의 행위가 잔인하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인터넷을 키면 그보다 더 잔혹한 21세기의 참상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속을 울렁거리게 했던 것은 이 모든 행위가 조선 전반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고 목적은 자신의 권력과 욕심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움, 분노, 질투의 감정은 끊이지 않고 누군가에게 전승되며, 복수를 낳는 거위가 된다.

 

또한, 우연히도 저주가 이루어지는 배경은 당파정치로 서서히 무너져 내리던 조선 후기다. 죽음 혹은 생존이 달려있던 환국 정치의 성종. 물과 기름을 섞고자 노력했던 영조와 성조 대까지 말이다. 끝내 몰락한 조선의 말로가 저주로 점칠 되어 있었다는 것은 퍽 슬픈 일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밝은 면 외에도 어두운 면도 우리의 역사로 간주하고 이를 통해 성찰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요구했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든 생각은 ‘21세기에서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다.’였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두려워 미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치솟는 실업률에 유명한 점집 문턱이 닳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사실 사주나 관상은 통계학에 근거한다 쳐도 타로나 점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작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통해 위안을 얻고 조언을 받는다. 하물며 첨단과학은커녕 기술영역을 잡과로 치부했던 조선 시대는 어떨까.

 

유교적 사상이 팽배했던 당시지만 백성들에게는 불교나 토속신앙이 더 가까웠다. 왕조가 바뀌어도 불교의 나라로 불렸던 고려의 풍습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양반들조차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저주나 주술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노비나 시종을 시켜 정적들에게 은밀한 저주를 퍼부었다. 백성 위에 군림하는 사대부라도 인간일 터, 미신은 인간의 정서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골목마다 CCTV가 즐비한 요즘에도 미제사건이 생기고 목격자의 진술이 절대적인 사건들이 일어난다. 하물며 과거에는 명백한 증거가 없으면 혐의를 입증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간을 증거로 만든다. , 자백하도록 끊임없는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 조금의 혐의라도 추측되는 용의자들을 이 잡듯이 잡아놓아 죽기 전까지 고문한다.

역사 드라마에 나오는 저놈이 진실을 말할 때까지 주리를 틀어라!”저는 억울하옵니다!”의 연속이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처럼 단편적이지 않다. 용의 선상에 든 사람들은 태생적 금수저나 군주의 특혜를 받는 이가 아니고서는 반송장 혹은 송장으로 옥사에서 나온다. , 본인이 혐의를 인정하지 않거나 다른 용의자를 발설하지 않고서는 죽을 때까지 형벌을 받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혐의를 인정해도 사건이 위중하면 죽는다. 간혹 살아서 나오는 이들이 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대부분은 죽고 만다.

 

우리가 역사박물관이나 체험장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곤장도 많이 맞으면 죽을 정도의 벌이다.

혐의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사회. 왜 무섭지 않겠는가.

 

철없던 어린 시절에는 왕은 좋겠다! 맘대로 다 할 수 있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커가면서 알게 된 것은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다.

숙면을 할 수 없는 살인적인 일정은 일상이고 자연재해의 발생마저 왕의 덕목 부족이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만석꾼 집안이 최고다. 이번 생에는 덕을 많이 쌓아서 다음 생에는 돈 많은 한량으로 태어나겠다.

사설은 여기까지 하고 은밀한 침실 사정부터 배설물마저 공공재였던 왕들의 사정이 눈물겹다. 당대에는 이해할 수 없던 그들의 기행이 지금의 추론으로는 정신병에 의한 행동이 아닐까 하는 것도 당연한 결과인듯하다.

 

특히 아홉 명의 왕 중 가장 눈에 밟힌 인물은 광해군이다.

요즘 사람들은 광해군의 업적을 새롭게 조명한다. ‘지는 태양 명[]이냐, 떠오르는 태양 청[]이냐.’ 선택의 갈림길에서 광해군이 선택한 중립외교는 조선반도가 피 묻지 않고 자생한 제일 나은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광해군의 앞, 뒤를 차지하고 있는 선조와 인조를 보면, 그의 일생이 가엽다. 젊어서는 도망친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터를 전전하고 백성을 구했으나 어렵사리 왕이 됐어도 지위는 불안했다. 결국, 사대주의로 사고가 마비된 사대부가 천거[薦擧]한 인조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이후 조선은 맹목적인 명나라 바라보기가 되어 병자호란으로 영혼까지 털렸음은 말할 여지가 없다.

 

아들에게 질투한 선조와 인조의 작은 그릇은 후대의 우리에게까지 발암을 유발한다.

 

당대 저주를 일삼았던 사람들은 저주의 행위가 실현된다고 믿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저주 대상에게 심리적 충격을 줌과 동시에 필요시에는 정적을 제거할 수 있는 용도로 이용하지 않았나 싶다. 마치 인조 대 조귀인(인조의 후궁)이 며느리 세자빈 강 씨를 제거하듯이 말이다. 물론 역사적 증거는 없지만, 맥락상 누구나 의심할 수 있지 않을까.

 

저주는 또 다른 저주를 낳고 미움은 더 커다란 미움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간혹 느끼는 타인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갈무리해야 할까.

또한, 권력에 대한 이기심은 인간을 어디까지 추락시킬 수 있을까. 인간은 영생을 살지 않지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후대의 우리는 권력을 갖기 위해 남을 저주하는 것보다 함께 공존하기 위해 서로서로 주술을 거는 것은 어떨까.